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허굴산(일명 허불산)북쪽 허리 자락에 자리한 ‘청강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청강거사로 알려진 정만민 진사에 의해 건립된 사찰로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진사절’이라 불렀다. 정진사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온 합천의 부호로 ‘정진사의 땅을 밟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대지주였다. 1910년 8월 이완용에 의해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후 정진사는 국권을 상실한 것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허불산 중턱에 청강사를 세웠다. 나라의 독립을 발원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독립자금을 대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독립 운동가들에게 거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정진사는 대웅전부터 요사채까지 14채의 가람을 세우고 공양미 500석을 시주했다. 그로인해 청강사는 인근의 해인사보다도 더 넉넉한 곳간을 가진 절로 유명했다.
만공, 운허 등 선사들이 다녀 간 곳.
정진사는 절을 세우고 당대 대선사인 만공스님에게 이 절을 관리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만공은 당시 수덕사에서 수행 중으로 해인사에 있던 운허를 대신 보낸다. 운허(1982~1980)는 평안북도 출신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강원도 봉일사에서 경송스님을 만나 ‘중 노릇 잘 하여 조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주면 그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불문에 귀의했다. 춘원 이광수와 어릴 적 함께 수학한 동갑내기 6촌 동생으로 이광수가 친일변절자라는 낙인과 아들 봉근의 죽음으로 괴로워 할 때 ‘법화경’을 소개해 불교로 인도했다. 훗날 인재양성을 위해 광동학교 설립을 추진해 오늘날 광동학원의 기초를 쌓았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팔만대장경을 한글대장경으로 옮기는데 온 힘을 쏟았다. ‘능엄경’을 시작으로 ‘무량수경’, ‘법망경’, ‘금강경’, ‘정토삼부경’ 등 경전 번역에 전념했고 ‘경을 통해 배운 것을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했던 운허가 해인사 강주로 지내 던 중 만공스님의 편지 한 장을 받고 곧바로 청강사로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그를 따라 청강사로 모였다. 그러나 6.25 전란으로 청강사는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 7채만 남아 전승되고 있다.
주지 혜광 스님의 출가
현재 청강사를 지키고 있는 주지 혜광스님은 1995년 해인사에서 계를 받아 불문에 귀의했다. 인연이란 것이 참 신기하게도 혜광스님은 정진사의 증손주 이기도 하다. 어릴 적엔 청강사에 놀러가 많은 스님들의 귀염을 독차지 했다. 그때만 해도 불교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승려가 되겠다는 뜻도 없었으며 절에 놀러 가도 스님들이 늘 “노래한번 불러 보거라” 했지 ‘부처님이 어떤 분’이고 ‘불법이 무엇인지’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랬던 그가 26살 되던 해에 우연히 불교 책을 접하며 출가를 꿈꾸게 됐다. 그러나 말이 쉽지 속세를 떠나 출가를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꿈을 접고 속세에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꾸렸다. 그런데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불혹을 넘긴 혜광스님은 결국 ‘더 늦기 전에 출가를 해야 한다.’는 확고한 결단을 가지고 해인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증조부가 남긴 절이 있으니 그 절로 들어가면 쉽게 승려가 될 수 있었을 터다. 그러나 스님은 멀리 돌아가더라도 제대로 가겠다는 절실함에 팍팍하다고 소문난 해인사로 들어가 행자생활을 자처했다. 그리고해인사 은사 고봉스님으로 부터 청강사에 대해 몰랐던 내막까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고 이후청강사를 지키고자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혜광스님은 “‘증조부가 세운 절이니 내 것이다.’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오히려 “사리사욕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이곳은 그저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부처님을 모시며 잠시 거처하는 곳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증조부인 정진사가 독립활동에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며 혜광스님은 독립유공자가 됐지만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 “속세의 증조부께서 쌓은 업적일 뿐 저는 출가를 하였으니 그 덕과는 상관도 없고 또 부처의 가르침에도 베푼 덕에 대해서는 흔적도 남기지 말라 했는데 어찌 그것을 탐하겠습니까.” 혜광 스님은 “살아있는 동안 청강사를 지키는 것이 본분”이라고 말했다.
청강사에는 혜광 스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듯 했다. 행자도 공양주도 없이 홀로 이 큰 절을 지키고 있었다. 혜광 스님은 “모두 잠시 머물다 갈 뿐”이라며 “오고감에 그 어떤 미련도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뒤를 이을 스님이 없어 청강사를 못 지키면 어쩌냐고 여쭈니 “싯다르타께서도 망해가는 아버지의 나라를 구하지 못했는데, 제가 죽은 후에 청강사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답했다. 혜광스님은 “조상을 욕보이지 않으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말했다.
허불산 중턱에 있는 길상대 이야기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절 주변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빼곡하지만 곧 봄이 오고 싹을 틔우면 청강사는 다시 어여쁜 봄꽃들과 짙은 녹음으로 둘러싸일 것이다. 청강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허불산 중턱이다. 허불산은 기암괴석이 유난히 많은 산으로 유명하다. 경내에도 큰 바위들이 곳곳에 100여 년 전 그 모습 그대로 터를 지키고 있다. 이곳 중턱에는 소원성취도량인 길상대가 있다. 이곳에서 만난 용바위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나툰 곳으로 소원성취 기도를 올리고 돌아가 일주일 안에 용꿈을 꾸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혜광스님은 고려 때 토굴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을 길상대로 이름 붙이고 건축 자재들을 손수 본인의 등짐으로 옮겨 기도처로 만들었다.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스님은 “부처님의 가피와 기도의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강사 ‘장(醬)’류 인기....4월 벚꽃음악회 ‘번뇌와 시름 벗어던지는 시간이 되길’
경내에 유독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가 눈에 띈다. 스님 혼자 사시는데 장독대가 유난히 많다 했더니 스님이 담근 된장과 간장, 고추장, 청국장 들이었다. 스님의 손맛은 이곳에선 유명하다. 음식 솜씨가 좋기로 소문나 ‘연등은 옆집 절에 가서 달더라도 공양은 청강사에서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러한 비법에 대해 스님은 “정성”이라며 “요리하다가 전화 받고 그러면 요리가 제대로 되겠느냐.”며 “음식을 만들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강사 장류는 스님이 직접 담가 판매하고 있었다.
대웅전 지붕의 기와 사이로 벚꽃 가지가 아름드리 드리워지는 4월이 오면 청강사에선 ‘벚꽃음악회’가 열린다. 올해로 16회째를 맞는다. 혜광 스님은 “많은 불자들이 이 날 만큼은 모든 번뇌를 놓아두고 삶에 쉼을 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길 발원한다.”며 합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