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 동해면에 위치한 해발 564m의 구절산은 산행에 부담이 없는 등산코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산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멋스런 산이다. 특히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진 폭포암과 그 오른편에 위치한 높이 17m의 구절폭포 그리고 그 위로 지난해 말 완공된 아찔한 출렁다리까지 자연과 절이 이루어낸 조화에 감탄이 절로 터진다. 붉은 빛이 강렬한 출렁다리는 아래에서 올려보아도 장관에 입이 ‘딱’ 벌어지는데, 다리 위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절경에 숨이 ‘탁’ 멎고 만다. 고성의 다도해는 물론이고 날씨가 좋으면 부산의 가덕도까지 시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에는 수량이 적어 폭포에 물줄기가 마르지만 여름 장마철을 지나면 바위를 뚫을 듯 쏟아내는 시원한 폭포수로 이곳은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도가 된다.
이곳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구절폭포 아래에 살던 용이 평천하던 중 마침 산 아래에서 여인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일을 저질러 하늘의 번개 칼을 맞아 그 몸이 산산이 부서져 이곳의 지형과 형태를 갖췄다는 이야기다. 머리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용두암이 되었다고 해서 용두폭포로 알리기도 한다. 몸통은 백호굴, 눈은 보덕굴, 생식기는 반달동굴이 되었고 꼬리는 흔들바위가 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용의 몸통이라고 불리는 백호굴은 오랜 옛날 호랑이가 살던 석굴이라고 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다. 현재 폭포암에서 산신각으로 꾸며 보존하고 있는데, 이곳을 기도처로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용두암 골짜기에 폭포암을 세운 주지 현각 스님은 “백호굴에 올라 기도를 하면 하산하기 싫을 정도”라며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고 소원을 성취한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때문에 백호굴을 찾는 이들 중에는 무속인들도 제법 있다. 스님은 남녀노소 누구든지 올라와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지만, 무속인들이 가져오는 모든 물건은 절 마당에 두고 올라가도록 고지하고 있었다. 징, 꾕과리와 같은 도구는 물론이고 음식조차도 가지고 올라갈 수 없다. 단정한 차림과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권하고 있다.
절벽 왼쪽에는 100여명이 한번에 앉을 수 있는 보덕굴이 있지만 이곳은 현재 개방하지 않고 있다. 또 옆으로 반달동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신비한 약수가 솟아나 절에서는 이곳에 용왕당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 그 옛날 나병환자들이 이곳 약숫물을 길어다 먹고 병을 완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산신당과 흔들바위
절 마당 절벽 끝머리에 용의 꼬리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흔들바위가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10명이 흔드나 1명이 흔드나 흔들리는 각도가 똑같다고 하는 이 신비로운 바위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다. 절에 올라와 이 흔들바위를 흔들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등산객들은 구절산에 오르면 이 흔들바위를 꼭 한 번씩 흔들고 간다.
실제로 백호굴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며 흔들바위를 흔든 사람들 중에는 소원성취를 이룬 이들이 많다. 지지부진하던 사업도 술술 풀리게 되고,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을 낳는다 던지, 병들고 아픈 이들도 쾌차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현각 스님은 “간절한 기도를 올리면 부처님의 법력으로 이곳의 신장님들과 산신께서 중생들의 아픔을 돌봐주는 것”이라며 “누구든지 이곳에 올라와 절실하게 기도를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절 밑에, 장기간 숙박하며 기도하고 갈 수 있도록 선방도 만들어 놓았다. 2~30여 명이 족히 들어갈 수 있는 방 2개와 취사 시설을 갖추었다.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단 공양은 스스로 해야 한다. 폭포암의 공양주 보살들이 노보살이 되어 모두를 챙겨 줄 수가 없어서다.
사명대사의 사두사가 있던 절터 아래 지어진 폭포암
영험함이 깃든 산신각과 흔들바위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져’
용두암 ‘출렁다리’ 완공으로 등산객들의 발길 이어져... 주차공간, 도로확장이 절실
사명대사의 사두사가 있던 곳
옛날 이 암벽 위에는 사두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들이 화살을 만드는 기지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 사실을 알고 쳐들어와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 되었다. 이후 현각 스님이 이 곳에 다시 절을 세우려 했으나 산세가 험준하여 절을 세우지 못하고 암벽 아래 절터를 찾아 지금의 폭포암을 지었다. 이때가 1978년( 2522년)이다. 현각스님은 “절벽 아래 절을 세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손수 길만 내는데 3년, 바위를 깍고 돌을 들어내 땅을 다지고 전기를 끌어오는데 또 3년, 전봇대를 바로 아래까지 끌어오는데 또 3년... 이런 식으로 세월을 보내며 손수 절을 세웠다.”고 회고했다. 스님은 “폭포암은 당시 신도들과 함께 세운 절”이라며 “신도들의 신심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여든이 넘어 스스로를 노승(老僧)이라고 부르는 현각스님은 “나이가 많아 이제 내 힘으로 무엇을 더 하기가 어렵다.”며 “마지막 발원이 있다면 주차장과 도로가 확장되어 더 많은 신도들이 불편함 없이 이곳을 왕래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