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조계종 팔성사

대한불교 조계종 팔성사

김태…

대한불교조계종 팔성사 법륜 주지 스님

 

부처님을 향한 신심을 바탕으로 한 영검한 기운

대한불교조계종 팔성사 법륜 주지 스님

 

-누가 보아도 놀랄만한 훌륭한 도량

-신심의 기도로 이루어지는 인연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대로 흘러갈 것

 

 

편집사용 (1).jpg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용계리 팔공산에 있는 사찰 팔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백제 무왕 때 해감이 창건한 곳이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해이 수도처로 삼고자 이 절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웅전, 삼성각, 극락전, 성적선원, 운점루, 망향대, 요사 등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그 형세가 무척이나 장엄하다. 대웅전 내부엔 석가모니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탱화로는 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상과 후불탱화를 봉안하였으며, 성적선원에는 석가모니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름다운 산과 나무에 둘러싸인 장엄한 사찰의 기운

푸르른 산속에 자리한 팔성사는 장수군을 대표하는 사찰로, 그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사찰로 올라가는 길엔 수 많은 나무들이 우거져있다. 단풍이 떨어지는 가을날에도 사찰의 길은 깨끗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그 넓은 곳을 어찌나 단아하게 가꾸었는지 입이 절로 벌어질 정도다. 그 모양새와 기운은 생동 그 자체여서 사찰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느껴졌다.

 

 

편집사용 (2).jpg

 



법륜 주지 스님은 스님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는다. “옛날 어른들에 비해 우리가 좀 덜 되었고, 우리에 비해 요즘 사람들이 좀 덜 되었잖아요. 그런 점을 바탕으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들에게 떠받들여지며 성장을 하지요. 스님이 되고자 오시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전 그분들에게 우리는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난 것이며, 배우러 온 것이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할 것 같으면 언제든 나가도 좋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현명하게 스님들을 지도하는 법륜 주지 스님이다.

 

20살에 들어와 55년간 함께 한 팔성사

법륜 주지 스님은 만 20세에 이곳에 와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현재 법륜 주지 스님의 나이는 76세로, 55년이라는 긴 시간을 팔성사와 함께 해왔다. “당시 스님들의 모습과 말투, 행동들이 모두 기억이 납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해야 바르고 흐트러짐 없이 이 길을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하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본질에 충실한 가르침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권력이나 돈에 집착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20231109_143643.jpg

 


법륜 주지 스님이 주지 스님이 된 것은 20여 년이 됐다. “35년간 모시고 살던 은사 스님이 돌아가신 후 제가 주지를 맡게 되었습니다.” 법륜 주지 스님이 주지를 맡고 나서 팔성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69년도에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세종대왕 때의 건물이라고 하는 건물만 한 채 있었습니다. 제가 온 이후로 법당도 짓고 석축도 쌓고 도량을 만들게 되었지요. 모든 것이 인연이 되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큰 도량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엔 법륜 주지 스님의 기도가 바탕이 되었다. “기도는 제가 머리를 깎은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는 것이지요. 새벽 3시부터 기도를 시작합니다. 3시부터 5시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를 하지요. 예불을 하고 천수경을 하고 기도를 마치면 5시가 넘습니다.” 한창 공사를 할 때에는 직접 돌을 나르며 종일 일을 하면서도 기도를 놓치지 않았다. “낮에 육체적인 노동이 끝난 후 저녁엔 좌선을 하기도 했어요. 온몸 구석구석이 쑤셨지만 난 앉아있을테니 너는 아파라하는 마음으로 좌선을 했어요. 몸이 아팠지만 이불을 깔고 잠을 잘 때보다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지요. 이튿날이 되면 다시 일을 할 힘이 생기고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편집사용.jpg


법륜 주지 스님은 기도에 대해 저축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저축과 똑같다고 생각을 해요. 평소에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면 자신이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말로 기도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을 하고 소리를 내며 관세음보살님을 찾을 땐 적어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들지 않으니까요. 그것도 모두 기도인 것이지요. 무언가 일이 생겼을 때 기도를 하는 것은 쌀독에 쌀이 떨어진 후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쌀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농사를 짓고 곡식이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기도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권해서 하는 기도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하는 기도로 인해 마음이 고요해지고 집중이 잘되면 그것이 자기에게 맞는 기도인 것입니다.”

 

20231109_143851.jpg

 


법륜 주지 스님의 반듯한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팔성사

절에 사는 주지가 가승이면 진불도 가불이 되고, 주지가 진승이면 가불도 진불이 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스님의 사상과 철학에 따라 도량이 그러한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바로 도량의 기가 달라지는 것인데, 이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팔성사는 이러한 기가 남다른 곳으로 이는 모두 법륜 주지 스님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기도를 바탕으로 한 모든 것에는 반드시 인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찰을 지을 때에도 법륜 주지 스님은 기도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24살 때 지리산 노고단 너머 한 사찰에서 3주간 단식을 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곳에 계시던 노스님 한 분이 무슨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냐고 하시며 당신이 갖고 계시던 그림을 물려줄 주인을 찾고 있었는데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 제 주인을 찾은 것 같다며 저에게 그 그림을 주셨어요. 그 그림을 지금까지 모시고 있지요.”

 

법륜 주지 스님이 이렇게 기도에 진심을 다하게 된 것 또한 인연에 의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없던 이곳에 법당을 짓기 위해 석축부터 시작해서 작업을 하다보니 막막했어요.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컸는데 기댈 곳이라곤 부처님 밖에 없었죠. 기도를 하러 명산을 다 다녔습니다. 한번은 노스님 옆에서 목탁을 치며 얼어 죽어도 상관이 업다는 마음으로 종일 기도를 드렸어요. 며칠 기도를 하고 기도가 끝나는 날 노스님이 절 부르시고는 무엇을 하려고 그리 열심히 기도를 하냐고 하셨지요. 신도들이 모이는데 절을 할 자리라도 하나 만들고자 한다 말씀드리니 원력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씨가 되어 오늘날 이 사찰을 만들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20231109_143700.jpg

 


법당을 짓고 난 후 모신 부처님에 대한 일화는 무척이나 드라마틱하다. “세종 20년 무오년 420일 복장 안에 서셨던 부처님을 939월에 도난당했어요. 그런데 30년 만에 돌아오셨습니다. 많은 사찰에서 25점의 부처님이 도난을 당했는데 주변의 권유에 제가 대표를 맡았고, 6년의 재판 끝에 저희와 다른 사찰들에 부처님을 모셔다드리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급 문화재인 팔성사의 아미타불좌상은 그렇게 팔성사에 다시 봉안이 되었다. 팔성사에 모셔진 탱화에도 역시 일화가 있다. 잃어버렸던 탱화를 서울시 한복판에서 찾은 것. “탱화를 찾으려고 고생을 하다 수많은 집들 중 우연히 눈길이 간 곳에서 그 탱화를 발견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저희에게 돌아왔고, 50년 전 그 자리에 탱화를 걸었습니다. 부처님도, 탱화도 본 자리에 오고 나니 비로소 저의 일이 끝난 것 같습니다.”

 

20231109_144113.jpg